1. 전쟁 중 시작된 실리콘 실험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은 고무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대체 물질을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고무는 군수 물자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특히 타이어, 방수 장비, 전선 피복 등에서 필수적인 재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항공기 제조업체인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의 화학자 제임스 라이트(James Wright)는 합성 고무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실리콘과 붕산을 혼합하여 실험을 하던 중,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물은 고무처럼 탄력이 있는 동시에 점성이 강하며 독특한 촉감을 가진 물질이었다. 이 물질은 손으로 잡으면 쉽게 변형되었고, 표면에 튀기면 공처럼 튀어오르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군수 산업에서 요구하는 튼튼한 합성 고무로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험은 곧 중단되었다.
2. 실험실에서 장난감 시장으로
이 독특한 물질은 군수 산업에서 활용되지 못했지만, 연구원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물질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사업가 피터 호지슨(Peter Hodgson)이 이 물질에 주목했다. 그는 1949년, 이를 상품화하여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하면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호지슨은 이 신기한 물질을 ‘실리 퍼티(Silly Putty)’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후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면서 장난감 시장에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실리 퍼티는 손으로 늘이거나 찢을 수도 있고, 신문 잉크를 복사하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어 다채로운 놀이를 제공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전역에서 베스트셀러 장난감이 되었고, TV 광고를 통해 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3. 현대의 슬라임과 그 영향
오늘날 슬라임(Slime)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 물질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1970년대에는 장난감 회사 마텔(Mattel)이 슬라임이라는 브랜드명으로 점성이 강한 새로운 장난감을 출시했으며, 이는 기존의 실리 퍼티와는 또 다른 촉감과 물성을 가진 제품이었다.
이후 DIY 문화가 확산되면서, 슬라임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감으로 자리 잡았다. 유튜브나 SNS에서는 다양한 색상과 질감을 가진 슬라임을 만드는 영상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개인들이 직접 자신만의 슬라임을 만들어 판매하는 시장도 형성되었다.
이처럼 원래 군수 산업을 위한 실험에서 출발한 슬라임은 예기치 않게 장난감으로 변신하여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제품이 되었다. 실리콘 실험에서 시작된 작은 실수가 만들어낸 이 혁신적인 물질은, 단순한 놀이 도구를 넘어 현대 사회에서 창의력과 감각 놀이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