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7세(이하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왕 중 한 명이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로 알려진 그녀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지적 능력, 그리고 로마와의 관계로 인해 현대에도 널리 회자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클레오파트라는 혈통적으로 "이집트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집트의 왕이었지만, 실제로는 마케도니아-그리스계 혈통을 가진 왕조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클레오파트라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는 어떻게 이집트의 여왕이 되었을까?
1.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 왕조 출신이었다
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기원
클레오파트라가 속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c dynasty)는 이집트 토착 왕조가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 중 하나가 세운 왕조였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장군 중 한 명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y I Soter)가 이집트를 차지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군림했다.
② 왕족 내부 결혼을 통한 혈통 유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외부인과의 결혼을 거의 하지 않고, 주로 왕족끼리 결혼했다.
이는 순수한 마케도니아-그리스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형제와 자매 간의 결혼도 일반적이었으며, 클레오파트라도 자신의 남동생과 결혼해야 했다.
이러한 전통 덕분에, 클레오파트라는 혈통적으로 순수한 마케도니아-그리스인이었다.
2.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유일한 프톨레마이오스 왕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이집트를 통치했지만, 대부분 그리스 문화와 언어를 고수했다.
그렇다면, 클레오파트라는 어땠을까?
①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의 프톨레마이오스 왕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공식적으로는 이집트의 파라오였지만, 대부분 그리스어만 사용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왕조에서 유일하게 이집트어를 배운 군주였다.
그녀는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이집트어를 포함해 9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집트인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했던 그녀는 정통 이집트 왕조의 파라오처럼 행동했다.
② 이집트 신들의 딸을 자처하다
클레오파트라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이집트의 전통적인 파라오처럼 신의 현신(化身)으로 자신을 포장했다.
그녀는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Isis)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며, 신격화된 이미지를 활용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인들은 그녀를 자국의 정통 파라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즉, 혈통적으로는 이집트인이 아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이집트적인 왕이었던 것이다.
3. 클레오파트라는 어떻게 ‘이집트의 여왕’이 되었을까?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 혈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대표적인 여왕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① 로마와의 외교 전략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로마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와의 동맹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와의 관계
이러한 외교적 전략 덕분에, 그녀는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②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려 했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상황에서도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마지막 파라오였다.
그녀는 로마에 종속되지 않고 이집트를 강대국으로 만들려 했으나, 결국 로마 제국의 확장 속에서 패배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한 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속주로 전락하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결론
클레오파트라는 분명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였다.
그러나 혈통적으로는 전혀 이집트인이 아니었으며, 마케도니아-그리스계 왕조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집트 문화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며, 이집트어를 배우고 신격화된 파라오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녀는 이집트인들에게 정통적인 군주로 받아들여졌으며,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인이 아닌 이집트의 가장 위대한 여왕"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